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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9장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복음을 전하라 보내시며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 (마태복음 10:10). 그리고 칠십 인을 세우시고 보내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누가복음 10:7).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추수할 일꾼이라 부르시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그들의 수고에 합당한 사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9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수고한 그들의 사례를 받을 권리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 설명합니다 (12절).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집에 유하며 지내라고 하셨지만,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이러한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다르지만 이유는 같습니다. 둘 다 복음을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 원리는 사도 바울의 전도 방법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20절),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되고 (21절),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22절) 모두 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2b-23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풀타임 사역자가 될 수도 있고, 복음을 위해서 텐트메이커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율법을 잘 지킬 수도 있고, 복음을 위해서 율법을 모르는 자들과 함께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방법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열심을 내어 전하려고 했던 복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묵상과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솟아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9장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실용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고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이유를 찾습니다. 적어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31-59

오늘 본문의 32절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는 무엇이며 또 자유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진리와 자유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이해했을 때, 진리와 자유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정치적 혹은

 
 
요한복음 8:1-30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음해하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웁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 이들이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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