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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9장

“메타인지” (metacognition) 에 대한 정의를 찾아보면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스스로 인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에 대한 생각’ 혹은 ‘인식에 대한 인식’으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 객관화를 위해서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메타인지에 해당합니다. 마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자신을 포함한 세상을 관찰하는 것과 비슷하고 볼 수 있습니다.  

전도서 9장을 묵상하면서, 전도자가 세상을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도자가 세상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발견한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부정한 자, 예배를 드리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모두가 동일한 운명 (destiny) 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운명은, 인생의 마지막이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3절).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분명하게 나타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그의 메타인지에 마지막 심판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도자는 이 땅에서 가장 복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를 기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7-10절). 여기서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라는 것은 쾌락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열심히 수고하고 그 대가로 받은 것들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쁨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음식과 포도주는 풍성한 식사를 의미합니다. 술을 마시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관자 되심을 믿기 때문에 미래의 불확실성도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전도서 9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한 가난한 지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지혜자로 인해 어떤 성읍이 구원을 받았지만 그 지혜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록 지혜가 있었지만, 가난한 지혜자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참 알 수 없는 부조리가 많습니다. 하지만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공의를 펼치시는 날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합리한 것들에 대해서 안타까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공의를 이 세상에 펼쳐달라고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9장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실용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고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이유를 찾습니다. 적어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31-59

오늘 본문의 32절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는 무엇이며 또 자유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진리와 자유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이해했을 때, 진리와 자유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정치적 혹은

 
 
요한복음 8:1-30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음해하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웁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 이들이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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