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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장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형통’ 이라는 단어입니다. ‘형통하다’ 라는 뜻은 일이 술술 잘 풀리거나, 어떤 일이 성공적일 때 쓰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이 형통이라는 단어를 요셉에게 쓰는 것이 맞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섬기게 됩니다. 형들의 배신과 노예라는 신분은 요셉에게 엄청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됩니다. 분명 성경은 요셉이 ‘형통한 자’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성공)의 개념이 세상에서 말하고 있는 성공이라는 개념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형통하게 하는 이가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요셉의 모든 행사가 성공적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은 각 개인의 노력과 재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때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과정을 보느냐 결과를 보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잘 해결이 된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서라도 괜찮다고 생각을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성공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으시냐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볼 때 결과가 나빠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은 성공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결과를 따지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성공 기준에 대한 가치관을 성경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세상적인 결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과정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길 수만 있다면, 우리도 요셉과 같은 형통한 자로 이 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입니다!

 
 
요한복음 9장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어려운 상황에 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합니다. 실용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고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이유를 찾습니다. 적어도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31-59

오늘 본문의 32절 말씀은 유명한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진리는 무엇이며 또 자유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셨던 진리와 자유에 대한 정의를 바르게 이해했을 때, 진리와 자유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정치적 혹은

 
 
요한복음 8:1-30

오늘 본문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음해하려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웁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절). 이들이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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